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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라는 것이 그렇게 광대한 것일까요?

2011.08.17 23:09

 

나의 존재라는

‘나’라는 개체적 존재성에 대한 의식을 말하는가요?

 

아니면 흔히 말하는 ‘공성’이라는 ‘법성’

또는 자아적 보이지 않는 실체의

근원적인 존재를 포함된 의미로서의 ‘나’인가요?

 

여기서 잘못된 가르킴의 부분과

부합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모순이 생깁니다.

 

‘나’라는 개체적인 존재는 불교에서는 ‘없다’ 합니다.

 

여러 이유겠지만 그들의 논리는 대충 들어

 

‘나’라는 존재가 공성의 일부분

또는 공성에 포함되어 있기에 없다 하는 것과

 

무상의 허무적멸에 관하여 없다 하는 것과

 

화엄이나 연기론에 따른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여 없는 것과

 

그러나 어떠한 요건을 가져다 붙여도...

 

실체상이란? 말 그대로 실체입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잠 오면 자야 합니다.

먹으면 싸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자체를 여래라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럴 연이란 그저 ‘연과’입니다.

이 세상의 연과지요.

 

오고가는 숫한 중생들 속에 하나의 개체일 뿐 입니다.

 

이점을 잘 파악하고 제대로 가르켜야 하는데

모두를 공성으로 놓으면 결국 답이 없습니다.

 

찾다가 헤매다가 그러다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고

그럴 연이 되어버립니다.

 

결과론적으로 도를 깨친다거나

도를 구하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요.

 

위에 말했듯이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이 여래라면

도라는 것도 굳이

전하고 가르키고 자시고 할 게 없다는 말이지요.

 

나를 깨우치고자 하는 것.

결과적으로 도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를 크게 나누면 도·덕입니다.

 

도와 덕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나 만 ‘덕’이 쌓여 한 ‘공’을 이룬다하니

가히 공이란 어려운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리 광대하다면

어찌 이 세상에 작용되는 것을

그럴 연이라 느끼며 스스로 자위하며 살까요?

 

많은 이들이 명상이나 요가

기타 여러한 도의 깨달음이란 이름으로

우주 일체 의식을 말하기도 하고

무한한 형태로 도를 말하기도 하며

자아란 존재를 설명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백날 천날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 일체 의식이란?

굳이 과학적 개념의 논리로 대비하지 않아도

이미 도가의 황제 편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설명되어 있지요.

 

노자 역시 이르기를

 

도를 무어라 이름 할 길 없어 ‘도’라 한다 했습니다.

도란 대저 하늘보다 높은 것 같더라 하였으니

어느 존재성을 지칭 한 게 됩니다.

 

그러나 다들 노자를 말해도

도가 공성(일체 모든 중생이 다 가진 것)

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노자는 ‘도’라는 명칭을

하늘보다 높다 하더라는 말을 사용치 않았을 겁니다.

 

이와 같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일체 또는

모든 법성의 공간이라 하겠습니까?

 

황제 편은 의술과 기타 여러 내용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이며

즉 ‘나’라는 개체적 존재의 구성이 아니라

‘나’가 존재하는

어떤 실질적 존재성을 언급하여 말합니다.

 

노자의 경 역시 마찬가지지만

장자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자는

그것을 ‘실사’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게 장자 편의

밤의 나비와 낮의 장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상식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일체의 공성에 포함된 것을

안다 또는 보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기 착각

또는 자아망상 환시 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그 정도로 광대한 것을 알았다면

그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존재를 안다면

그 자체는 광대함이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체도

역대 이래로 몇 안 됩니다.

 

우리는 이들을 ‘성인’이라 합니다.

 

이 나라는 도가에서도 존재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불가의 경전역시 중요한 대목에서는 마찬가지 입니다.

 

흔히들 아미타불이라 합니다.

 

불가 말로 하면

이 세상 모든 중생은 아미타 화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생들이 아미타불일까요?

 

아니면 중생을

파생시킨 아미타불을 아미타불 이라할까요?

 

어떻게 보면 두 가지 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잘못 곡해를 하면

그 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닮았다 해서

아들을 아버지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광대한 ‘나’라는 것은

우주일체, 지구, 국가,

‘나’라는 육신적인 ‘몸’입니다.

 

흔히들 정신적인 것이나

또는 어느 보이지 않는 존재성을

마치 아는 듯이 말하는데

그러고 수련하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 보이는 것 모두가

각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안의 자기 자신 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종교로 말하면

‘삼위’ ‘삼신’이라 합니다.

 

이간이 최대한 깨우 칠 수 있는 상식적 선상

그것은 ‘철학’입니다.

 

이것을 ‘사상’이라 합니다.

 

인간이 최대의

지성과 감성을 나타 낼 때 왔다 갔다 하는 것.

이것이 ‘에고’입니다.

 

에고란?

이미 ‘사상’과 ‘삼신’의 단계에서

‘육’과 ‘정신’이 갈등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또는 혼자만의 것을

마치 공통분모인양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요.

 

인간은 진짜 에고의 선상에 걸리면 죽습니다.

 

이러한 에고를 가지고

자기가 보는 자기의 세계 그것이 ‘문학’입니다.

 

그러나 님이 말한 또는 모든 분들이 말하는

‘나’라는 자아적 존재가 광대무변함은

그 광대한 존재입니다.

 

불가에 전하기를...

미륵의 일탄지에

석가모니의 53선지식이 무너졌다 합니다.

 

석가모니가 찬탄하기를...

미륵의 도를 광대무변창해라 했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나, 인도의 석가모니와 이런 식이 아니라

그 두 분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이 나라에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가 광대무변함은

이러한 존재일 것입니다.

 

아미타불이, 아미타불의 화현과 같지 않은 존재,

즉 동일 조건의 존재가 아니듯이

‘나’라는 광대한 존재는

모든 것을 포함한 존재입니다.

 

일본인들은 어휘를 정확하게 합니다.

 

우리는 통칭 피플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사람이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 하며 이 존재는 개체적 존재로 구분합니다.

 

지구상 모든 인간의 집합체.

이 집합체를 ‘사람’이라 합니다.

 

인간 각자는 각자의 개체적 존재입니다.

 

아비가 자식도 마음대로 못 합니다.

왜 그럴까요?

개체적 존재이기에 그럽니다.

그러나 그 개체 속에

아비의 유전적 형질이 전해져 있습니다.

 

광대한 ‘나’라는 존재 의식도

명상에서 ‘브라만’이라 하든

불교에서 말하는 ‘공한 성품’이든

또는 신앙인으로 아미타불의 화현들이라 하던

하나님의 자녀라 하던

각기 생김새 모양도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의 형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나의 공통적인 형질이 있다고

그 본체도 같다하지는 않겠지요.

 

명상이나 믿음 역시

이러한 과정을 분별해야

바른 길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