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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짧은생각 ???? 아라한과 부처님 고뇌와 열반 ???

2011.01.10. 19:43

나요

 

 

무자게 어렶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 대갈통을 까버렸을 겁니다.

 

이거는 마치 삼장이 손오공에게

매일 쓸데없이 씨브렁거리는 소리

즉 소음일 테니까요.

 

도라는 것 이것은 부처님이라 이름 하는 분의 도나

그 이전 공자의 도나 노자의 도가 같은 것일 겁니다.

 

다만 여기서 부처님이라 이름 하시는 분의

이전의 도의 내력을 공부하지 않거나

공부할 필요가 없다 해도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했는가를 알아야 함이

가장 중요할겁니다.

 

부처님은 중생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전달하신 바가 없답니다.

 

다만 그러하다면 부처님 열반 이후 결집된 경전에서

그 유래가 전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경전을 결집한 취지의 주인공들이 아니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나 그 누구라도

무엇을 깨달았다하든지 깨달음을 구하던지

부처가 될 수 없음 입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유정무정이

다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정의부터

다시 알아야 할 듯합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이라 한 분은

분명 사십 구년을 걸식하며 많은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단 한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 부처가 아니면서 부처입니다.

 

적어도 부처의 가르킴이 무엇인지

부처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가 도에는 선맥이라는 종지가 있습니다.

 

이 역시 다만 오랜 시절 육조로부터 단경되었습니다.

 

유불선 삼가의 보장을 ‘삼법’인

또는 통칭하여 도가라 합니다.

 

이것을 삼왕의 도라 이름하며

때로는 인류역사에 삼황이라 전해지기도 합니다.

 

도를 깨우치던 불도를 이루고자 원하든 간에

진리를 알려면 진실 된 도리를 따라야 합니다.

 

종교란 개념은 오제의 본기를 말합니다.

 

도라는 것은 부처님이 행하신 것이나

그 이전 노자와 공자가 행한 것이 같은 것 입니다.

 

다만 부처님이라 여러분이 알고 있는 분이

가장 오래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의세설술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구게의 의미 입니다.

 

즉 부처님은 여러분들이알고 있는

또는 공부하고 있는 그러함을 가르킨게 아닙니다.

 

다만 열반묘심의 도리로 방편하신 것이며

이러한 행의 과정을 의세설술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즉 가르킨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왕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한 분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깨달음을 얻으시고

49년을 설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의세설술

즉 병든 세상을 고치고 여래설 하는 과정이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선맥의 종지

즉 초조달마가 신광을 만나면서

신광 역시도 여러분들같이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킴을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광은 그러한 행위를

달마로부터 질타를 받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이미 부처님이 존재하시던 그 시절에도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유마거사로부터

달마가 신광에게 호된 질타를 하듯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것이 유마경입니다.

 

아니 그 대단하신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어찌 유마 같은 거사에게 그렇게 꾸지람을 듣고

한마디로 쪽팔릴 정도로

그 앞에서 말대꾸한번 못했을까요?

 

유마는 부처님의 또 다른 한 면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리석어

그것을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하기로 하고

달마는 결국 잘못된 것을 꾸짖는 것으로

결국 신광에게 봉변을 당합니다.

 

그러나 도성의 근기를 잘 알고 있는 달마기에

신광에게 트집을 잡자고 한 것이 아니라

신광을 바로 가르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신광은 본 종지를 깨달아

달마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스스로 사흘 밤낮을 설 밭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참회와 결연의 의지로 스스로 좌수를 단죄합니다.

 

이것이 도의 무서움입니다.

 

부처님은 가섭에게 삼처를 전합니다.

 

그리고 열반에 들어

마지막 까지 깨우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열반묘심의 도리를 내비칩니다.

 

다만 가섭과 함께 할 때

부처님은 가섭에게 도를 가르키면서

결국 마음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이것은 도의 ‘행공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여러분들이나 수행한다는 이들이

그리도 찾고 찾다가 가는 끝없고 답 없는 길입니다.

 

결국 있고 없고

오는 바 없고 가는 바 없으며

이것은 허무도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마음을 설하시면서

가장 경계한 말씀입니다.

 

가섭아! 마음이란?

과거의 부처도 이를 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니라.

 

‘도’의 궁극적인 것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것은

이미 플라톤이나 히포크라테스로 부터도

시도된 것들입니다.

 

다만 이들은 마음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결국이로 인해 해부학과 현대 의술의 시초가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마음의 존재를

누구보다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거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역설 고타마 싯다르타는 결국

고집멸도 이후 적멸한 위락을 얻습니다.

 

이 과정은 진공묘유에 있습니다.

 

이를 일러 부처님이 깨달아

무상사의 지위에서 조어장부하는 과정을

도가에서 진공묘유라 일편 한 것입니다.

 

이것은 도 입니다.

 

이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도의 내력이 깊어야 합니다.

 

그래서 득도자는 즉현시불

태초의 불세존이라 하는 것입니다.

 

도의 실체 즉 마음을 불가에서는

그대들에게 안 가르켜 준 바 없습니다.

 

다만 그대들이 그대들 욕망과 어리석음

그리고 고집적인 아만과 편견에 의해서

그대들의 길을 자업자득 할 뿐입니다.

 

이것을 불가에서 삼독이라 합니다.

 

삼독을 여의기 위해서 중생은

한없는 자비심과 한없는 하심과

한없는 나의 존재의 무상함을 깨달아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불가의 개경게

즉 여러분들이나 불교에 신앙하는 분들은 누구나 아는

개경게에 마음의 존재를 여실히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 하나를 깨우치는 것.

참으로 죽음보다,

지옥의 고통의 연과를 얻기보다 어렵고

어려운 것이라 말합니다.

 

무상심심미묘법입니다.

 

누가 있어 이러한

무상심심미묘법의 도리를 깨우쳤다할까요?

 

있다면 그가 곧 부처이며

아니! 태시의 불세존입니다.

 

분명 같은 말이며 같은 문구이나

어느 자는 이것의 실상을 알고 어느 자는 모릅니다.

 

이것이 오직 진실 된 도의 가르킴이며 도의 내력이며

즉 도자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를 깨우치기가 백천만겁 난조우라 하니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길입니다.

 

그나마 만나는 인연 속에서도 원해의 여래

즉 마음이라는 것은 오직 진실함이니

이를 일러 진실하지 못하는 믿음과 구도의 길은

아예 해당조차도 안 된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본디 도가 동방에 있다가

서방의 한 중에게 건너가니 란 말은

여러분들이 그리도 애타게 그리는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서방의 도가 펼쳐지면서 만법이 펼쳐지고

그로인해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교화의 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의 근본을

오제의 본기라 합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간단합니다.

 

동토로 부터 시작된 도가

다만 그 연유를 따라간 것입니다.

 

이것을 의세설술 이라하나

불교에서는 여래설이라 가르킵니다.

 

다만 여래설이란?

금강경에 여래설의 진실 된 도리를 가르키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는 것은 그대들의 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무엇이든 실체를 알고자하면

그 길이 단전되면

첫 단절된 곳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아는 자에게는 또는 인연이 있는 자에게는

접시 물에 코 박기보다 쉬운 일이나

 

모르거나 그러지 못한 인연은

접시 물에도 빠져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생을 말해봐야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것이

도의 내력이며 연혁입니다.

 

부처란 통칭하는 말입니다.

 

부처란 이 땅을 말하며

그래서 그대들 역시 부처의 화신이라 합니다.

 

부처란 하늘에서는 불이며 ‘존야’이며

이 분이 세상에서는 이분을 ‘일대사’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란 이 땅의 중심이며

모든것을 나고 죽게하는 근원입니다.

 

이분이 여래설을 하시게되면은

그 분이 곧 불세존이시며 이때를 일러 법이라 합니다.

 

그래서 법주라 이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깨우쳐 무엇을 하고 굳이 법문이라 하나

그 법문이 법문이 될 수 없는 것은

법계가 응공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여래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의 설법은 그 실상이 나타나면

법계는 그 명을 받들며

천과 지가 하나로 그 명에 따라 실상 하니

이를 일러 실상묘법이라 한 것입니다.

 

다만 중생의 나고 죽음 역시

이 명에 따라 그 현상을 실상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이 불국정토.

즉 천년의 용화세계나 천년왕국이라

이름 지어 불려지는 것

역시 여래설에 의해서 그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보게 되는 자들은

수많은 중생들 중에

오직 열반묘심의 도리를 깨달아 알아

이미 이 일세계가 열반 상태에 있다는 것과

이러한 것이

그대들의 잘난 깨우침이나 어리석은 알음이아니라

오직 지나간 세월에 방편 된

부처님의 사구설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모르면 그들은 단연코 불제자나 불자도 아니며

그 흔한 신앙의 종자들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거이 불종자를 끊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성불이란 각자의 개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 완성된 존재. 즉 모든 중생이 화현이나,

그 화현된 중생들이 하나의 완성체.

즉 부처라 이름 하는 존재

세간해 지위에 오르는 존재를 말합니다.

 

여래십명호는 다들 이미 아시다 시피

인간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남으로

그를 여래라 합니다.

 

그러한 여래성에는

하늘도 응공(받아준다는 뜻)하기에

이를 응공이라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바른 지혜 바른 분별력을 갖추어

스스로 견해를 내지 아니함으로

그 존재의 깨달음이 성숙하는 단계

즉 정변지를 갖추었다하는 것입니다.

 

정변지를 갖추었거든 인연을 만나

반야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격이 있기에

이 때부터는 견성을 할 수 있답니다.

 

이를 일러 견성하여

스스로 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을 확인하여

그 스스로 온 길이

명행족에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부처님께서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신 가르킴이

자등명 법등명 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재하여 그 길을 가고자하는 이 라면

당연히 자기 길,

자기의 지난 세월의 과거 생을 돌아보아

알 수 있을 것이며

이 또한 그 길의 과정이 밝음에 있었는지

혹은 어둠의 길을 걸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직 떳떳하여 장부라면, 이 길에 들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쾌활 쾌활 이라.

최고락 당당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선서하여

부처의 가신 길에 동참 할 수 있으니

이때부터 깨달음에 대해서 가히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달마가 말한 오향 중

가장 수승하다는 지견해탈의 문에서 반야지혜

즉 이것을 일러 비로소 해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능히 깨우치거든

이를 부처라하여 세간해라 하는 것으로

오고가는 이치를 깨달아 오고가지 않으며

스스로 자재하는 지혜를 갖추었다 하는 거 입니다.

 

여그까지가 반야심경의 구결을 깨달아 통과하는 단계

즉 반야 지혜를 갖추었다 하는 거입니다.

 

^^ 길이 있던 다른 세계가 있던

아니면 이 세계의 육도의 이치를 깨우쳐 알고자 해도

알아야 건너든지

아니면 좌불통(방통)하던지 할 것 이기에

그리 말하는 거 입니다.

 

이 글을 숙고하여 읽어 보면은

왜? 부처님이 자비를 베푸신 것인지

또 얼마나 중생들을 사랑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이라 하신 석가모니는

이미 금강신으로

금강바라밀다심경과 아울러 묘법연화경을

마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묘법연화경에 항상

실상묘법연화경 석가모니 종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나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이 길을 건넜으며

인간으로 이 길을 건너는 자는

전에도 후에도 없으리라 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존중 받는 것은

이미 도를 득하였으면서도

사구게로서 의세설술 하였다는 것이

중요하게 존중 받는 것이며

이를 일러 자비성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