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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한계에 그치지 말라 / 2011.09.20 16:27

category 2011년/9월 2024. 2. 9. 10:10

부처의 한계에 그치지 말라

2011.09.2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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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지극히 타당하고 논리 있는 말입니다. ^^

 

고타마의 이야기는

천궁의 이야기가 석가모니를 통해서 전해진 바이며

석가모니는 이러한 것을 세상에 가르킨 것입니다.

 

찰나에 얻은 깨달음

이미 우주법계의 진리를 깨달았지만

그때도 현재도 말한다 해도

중생이 이를

다 받아들이지 못함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불가경전에도 전해지듯이

부처의 말은 부처만이 알아들으며

여래의 말은 여래만이 알아듣는다.

한 바와 같습니다.

 

부처의 한계.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그 한계에 머물든지 다가가든지 할 것이 아닐까요?^^

 

중생이란? 부처도 중생이며

중생이란 현실에서는 순간순간 깨달아 거듭나며

변해가는 화엄을 중생이라 합니다.

 

부처역시 마찬가지이며

세상은 시공을 흐르고

전에 부처 역시 어느 공간에 존재하든지

아니면 여타의 중생들과 같이 나고 죽고 하든지

온다면 중생이요 간다하면 또한 중생인 것입니다.

 

도가의 깨달음의 길을 표시한 길에

‘중묘지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다면

부처도 중생이라 한 연유를 알 수 있겠지요.

 

도가의 ‘일도’를 찾는 이정표에

세상의 연원을 ‘허무지음’이라 합니다.

 

허무한 곳에서 천지지근이 있었고

이거이 ‘음’이라 하였으니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르켜 반야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으나

이거를 보고서 아는 자와

말로 듣고서 주절거리는 앵무새와는 다르겠지요.

 

이거를 ‘공’이라 한 것입니다.

 

천지지근은 현지우현이라 했으니

도가에서는 이를 가르켜 ‘현문의 일도’

즉 ‘현빈’이라 했습니다.

 

이 현빈이 몸에 있으나 몸에서 찾지 못하고

몸 밖에서는 더더구나 찾을 수 없다 함은

이거이 중묘지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뜻 바로 알거든

왜? 부처도 중생이라 했는지를 알게 되며

부처가 무엇 때문에

생사를 여의고자 했는지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찰나에 깨달은 그 마음이

부처를 열반에 들게 했고

인류를 위해 49게를 설하게 하여

이를 가르켜 도가에서는 의세설술 이라하나

이미 의세설술은

부처 이전의 부처들도 그 법을 설했으며

다만 방편 했을 뿐입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글을 쓴 대로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글이나

세상은 이상을 향해 꿈꾸는 이상향의 날개가 있듯이

세상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꿈이고 이상입니다.

 

그것이 허상이고

잡을 수 없는 ‘이상’일지라도 말입니다.

 

오백라한은 본디

님들이 알고 있는 부처의 제자가 아니라

본래 불세존의 천궁의 ‘가신’들 입니다.

 

본래의 불세존은

중국의 도가 내력서나

이 나라에 전해지는 내력에 보면

중국으로 부터 아세아에 문명을 가르키고 펼친

제 삼성으로 표현되는 ‘가섭불’입니다.

 

세상에서는 칠성을 말하나

 

이 세상 모든 종교나 법칙은

자연의 법칙마저도 칠성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황제내·외장유경에 보면 외경에 이르기를

세상은 ‘삼’으로 지배되며

‘사’물은 굳이 말한다면 사성이 사물입니다.

 

‘삼’이란 본래 ‘회삼귀일’이니

하나에서 시작했으니 이를 ‘음’이라 합니다.

 

이것이 이 나라 천자문의 가장 기본인

문명을 가르키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 되었으니

이를 가르켜 천자문에 ‘천지현황’이라 한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연등불인 연등태자 일대기를

자기 삶에 투영시켜 말했듯이

예수의 생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역시 항상 내안에 계신분이라는

자기를 가르켜 이인칭 하였으니

예수는 이를 가르켜

다시 ‘아버지’라는 말로 방편 하였습니다.

 

다만 부처의 가르킴을 세상이 오도하고

그 본질을 왜곡하여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어찌 그대들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작은 왕국이라도 왕국을 뒤로하고

스스로 고행의 길에서 맨발로 걸식하며

49년을 의세설술하여 법을 설하고

또 다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을 위하여

‘무법설’이라 하였겠습니까?

 

불가 경전은 ‘교본’입니다.

 

이 세상에 파생된 모든 경전의 해답이 있으며

가장 적나라하게 가르켜 놓은 ‘인류사의 정본’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불교 발생지라는 곳에도 없는

팔만대장경이 방편 되어 있으며

이를 가르켜 ‘정법경’이라 합니다.

 

도가의 경전은 위에 잠시 언급했지만

사성사문이면 일시에 깨달아 확연하여 도를 이루니

이를 가르켜 불가 최상승 경전에는 이르기를

 

득도자는 즉현 시불이며

이 말은 태시의불(하나님) 이며

현세의 불이란 말입니다.

 

득도자는 즉현 전륜성왕이며

(도가의 일도로 뇌천대장

쾌상으로 시작하는 진천이란 뜻입니다)

 

득도자는 즉현 제석천(뭇 하늘 중 하늘 왕)이며

 

득도자는 즉현 범천이라 한 것입니다.

 

범천이란 신들 중 왕으로 신왕,

호천금궐의 고상옥황.

즉 우리말로 말하면 ‘상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 중생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안타까움에 과거 삼니(천부인들)들께서

의세설술로 법을 설하였으며

석가모니 역시 일찌기 원년에 말하기를

훗날에 오는 그 분이 득도자라하여

이 나라에는 진인 정도령 등

여러 경로로 전해진 바입니다.

 

본디 불가설에 의하면

진인은 칠성 중(과거칠불)에

제삼성인 녹존을 녹존대성인

또는 녹존진인이라는 칭호를 명기해 놨습니다.

 

도가에서는 녹존을 하한 성군이라 하여

이 세상이 아닌 별개의 세상에서

이 세상에 문명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자로 전해진 바입니다.

 

이것을 불가에서 알지들 못하고 가르킨

‘삼성’과 ‘사성’의 경계입니다.

 

이 나라 천부경엔 간단하나마 명료하게 이를 가르켜

운삼사성환오칠이라 하여

인간이 세상에 존재되는 연원을 밝혀놓았습니다.

 

인간은 본디 태시 기사굴산에서

부처의 모습으로 지음 받아

진화적 차원을 거치면서 진화해왔습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존재와 다른 것은

이 나라 삼천리금수강산의 중생들로서

 

본디 불께서 그 뜻을 혜량하여 그 소원을 들어

부처의 모습으로 직지인심 한 것이며

 

이를 가르킨 경전이 ‘직지심경’입니다.

 

그 날에 당시 이르기를...

 

너희가 현재의 모습은 짐승이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라

 

그러나 훗날 시대가 이르면

너희의 모습은 부처이나

마음은 짐승의 마음이 되리라

 

한 것입니다.

 

흔히들 이러한 경전을 전하면서

이때를 말법시대라 한 바이며

 

여타의 종교론 적 가치관에서 말하는

‘종말’이라는 시대적 시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만큼은

시대적 종말을 말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형성해나가는 새하늘의 변천사로

모든 예언에 기록되어 전한바이며

이때 나타나는 중생과 같은 인류상에 기인이

이 세상에 이 나라 강토로 온다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계적 토향과 그들의 풍속에 따라

위작되고 또는 오작되어

종말을 마치 세상의 끝인 것 같이 말하나

이러한 한 세대가 지났음은

이들의 전해진 위작된 경전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다만 진천이 있기에 이를 가르켜

천자문에도 이끼언 이끼야 라 하였으니

그 본성이 이끼 야 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에서만 전해지는 족보로 보게 되면

성씨에 유일하게 언 야가 있는 성씨가 있으니

 

이러한 속성이 본래 ‘천본’이라는 말입니다.

 

‘천자’도 모르면서 천자문을 말하고

천자를 사칭한 자 죽으리라 한 바는

당연한 것입니다.

 

주역은 팔쾌가 기본이며 팔쾌는 팔향이니

다 그저 진불의 손바닥 안의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쥬신)은 팔도라 하였으며

본디 불가에서 전해지는 부처님의 수인은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도가에서는 이를 가르켜

일찌기 그는 을척 또는 금척을 가지고 있다했으며

서양에서는 신은 기하학을 즐긴다 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괴강을 밟고 검무를 추니

이를 가르켜 칠성을 밟고 이르기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한 바입니다.

 

하늘과 땅 아래 홀로귀한 존재.

즉 하나 밖에 없는 님 인 ‘하나님’이란

순수한 우리말들입니다.

 

훈민정음의 28자 중 쓰지 않고 감춘 ‘일 자’

이것이 바로 울 (⊙) 이라는 모든 것 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도가에서 그 안에 다 있다 한 것이며

이를 가르켜 감추어 전하기를

알고도 모르고 모르고도 안다 함은

이러한 일자를 가르킨 말로서

이것은 시기가 되기 전

‘일자’가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도가 선맥에서 전한 유래를 불가의 땡중들이

그 뜻도 모른 채 더러 써먹으니

흔히들 말하기를 도란?

알고도 모르고 모르고도 안다는 것이라 하여

선지식들에 의해 전해진 바를

그대로 앵무새 맨키로 써먹으나

이는 진실은 모른 채 말로만 전하는 것입니다.

 

본디 도가 선맥에서 이를 가르켜

알고도 모르고 모르고도 안다함은

분명 도가 맞으나

이는 ‘무기’라 하는 것 이니

 

옛 부터 이 나라 예언서에 달리 전하기를

오십무기토가 용사한다 한 것입니다.

 

즉 여기서 ‘오십무기토’란 것은

삼사성의 경계에 들어 무기가 사용한다는 것인데

위의 ‘금척’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가 선맥의 무기란?

 

無記 이니, 없는 기록.

그러나 있는 기록 이것이 ‘무기’입니다.

 

이것은 기실 몸의 언어.

즉 그 몸에 있기 때문에

이를 가르켜 불가에서는 ‘정법안장’이라 하였고

도가에서는 이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도의 내력이 약한 자들은

기실 도가의 경전 그 뜻 자체마저도

단 한 자도 알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문구에

이러한 기록들이 전해지니

성경에는 이를 가르켜

그는 금갈대를 가졌어라 한 것입니다.

 

그들이 전한 ‘규빗’ ‘척수’는

이것의 사용 용도를 말하며

인간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으니

 

이것은 인간이 사람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범망진을 불가에서는

범망경다라니가 천계에 펼쳐져 있다 한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

그 세대는 성숙된 수행의 길에서

자기 삶의 여정을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로

 

흔히들 영생을 말하고

탈퇴 환골을 말하는 자들의 이상인

그러한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그 누구라도

부처라 하지 않았으며 부처된 이 없으니

이 길에 들어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의 한계에 그치지 말고 넘어서는 것.

그것은 금강의 길이니...

 

이것을 전하기를

금강반야바라밀다라 한 것이며

이러한 바라밀다행은 금강신이 아니라면

초입조차 들 수 없는 경으로

이를 가르켜 도가에서는 진공묘유라 했으며

불가에서는 무상사 조어장부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묘법을 실상묘법이라 하였으며

이 경을 마친 자 인류이래로

인간으로는 단 하나 있으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이 길을 간 자

전에도 없으며 후에도 없으리니 전무후무라 하였으며

오직 나 석가모니 하나라 한 것입니다.

 

석가모니란 우리말로 능인이란 뜻이며

이는 석가모니가 아뇩달지에서 깨달음을 얻고

안수정등에서 내려 받은 법명이 ‘능인’ 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대들

허접하고 짧은 지식으로 알음하지 말고

가히 인류사의 자비로움으로

인류를 말없이 연민하는 성인들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욕망이나 욕심으로 그 길을 가는 것 아니며

그저 길이 있기에 그 길을 가며

 

가고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바

행하고 행하다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스스로 자숙하여 고개를 숙여

진천이 있음을 감사하고

자기 생을 의탁하니

이를 가르켜 스스로 지심귀명례 하니

 

삼보귀의 지심귀명례는

땡중들을 가르켜 말하는 바가 아니라

불에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일자 승에 귀의하니

불가에서는 이를

일불승(하나의 오르는 자)이라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를 가르켜

백보좌에 앉으신 분이라 하여 전했으며

이 나라 전래되는 예언이나 경전에는

운중왕 이라하였으며

본시 언야이기 때문에

하늘의 ‘범박’ 또는 ‘용천박’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불가의 아미타 경전에는 이를 가르켜

여래밀인(여래가 감추어 전한 밀인)

옴 다롱 박이라 하였으니

이는 여래의 정법이 안장된 곳을 말하는 것으로

정법이기에 하나님은 공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천태만상이며

삼라가 만상으로 나타나니

여타한 경전을 오도하고 짜집기를 하여도

빠져나가거나 도망칠 곳이나 숨을 곳 없다는 말이며

정법을 옆으로 펼치면

8만 정법이 ∞ 무량경이 되므로

이를 무량수라 한 것입니다.

 

즉 여타하게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착각하거나 자기최면에서 그러한 듯 하여도

진실은 벗어나지 못함을 경계 한 말로

스스로 자숙하고 겸허한 행동으로

습(아뢰야식)에서 벗어나라 이른 말입니다.

 

이것이 옛 선지식들이

천기를 발설하여 율계를 범하여

닦아온 길을 그르칠까 두려워 말한 게송이

그러나 중생을 자비로 일깨우고자한 것이 바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입니다.

 

도가 경전에 전하기를

그대들의 생의 삶은 그대들도 모르나

이미 ‘녹화’되고 ‘녹음’된다 하였으니

산은 푸르고 빽빽하여 밀밀하나

그 안에 들여다보면

온갖 것들이 다 생장하고 멸하니

 

이를 ‘생장염장’ 한다 한 것입니다.

 

^^ 이것을 때론

종교적으로 베리칲 또는 바코드라 하나

 

이러한 연유는 성철이 말한 대로

두견새 슬피 울 제 1234567 악! 한 것 입니다.

 

이미 세상은

그대들 666이라는 예언은 이루어졌으며

666은 컴 자판 상 ^^^ 입니다.

 

인간의 두뇌역시 컴과 같은 ‘이진’이며

세상은 이진으로도 충분이 통제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일찍이 서양의 성철들이 말하기를

신은 기하학을 즐긴다 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킴은

그대들에게 부처가 되라는 말아니고

부처의 길을 가라는 말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격을 함양하여

주어진 격 만큼으로 참사람이 되라는 말이지요.

 

도와 덕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니

가는 길 역시 갈래갈래 가지가 무성해도

그 근본은 하나로 귀일하는 것

 

이것이 참 수행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행의 길을 가르켜 간단하게

대학지도는 명명지덕에 있다함은

밝고 밝은 덕은 공을 이루는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공부 바른 수행의 길에 들어

밝은 덕으로 자기를 위하고

다가오는 인류사에 밝은 빛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