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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복된 마음. / 2010.12.23 20:22

category 2010년/12월 2024. 2. 9. 09:38

[불교] 복된 마음.

2010.12.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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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 ;

앞 선생에 수행에 의해 만들어진 지식

즉 누진된 생업을 깨우쳐 아는 수행인을 말합니다.

 

복된 마음 ;

일체의 살아가는 생의 감사함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고 순응하는 마음입니다.

 

복된 마음의 단계라 굳이 말하면

중생의 생업에 의한 복이라

생각하는 개념을 말할 수 있으나

부처님이 말한 복된 마음의 단계는 인연복 입니다.

 

물론 이러한 인연복은

이미 지난 세에서 닦은 길에 수반되는 것으로

법화경에 기록된 복은

법화 행자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편적으로

중생들이 중생의 인과 복으로 말하나

법화경 맥락을 이해하면

중생과 상관없는 복을 말하는 것으로

중생이 심기를 깨달아 알면

이러한 인연복과 관련이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인연과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복은

아무 때나 스치듯 만나는 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삼천년 만에 만날 수 있는 시기.

즉 때를 말한 것 입니다.

 

그것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충 설명 하는 부연 설명에서

거북이가 바닷속에서 있다가

삼천년 만에 숨(호흡)을 쉬러 바다위로 올라 올 때

하늘에서 바늘 하나가 드넓은 바다 위

그 중에서도 거북이가 떠 있는

거북이 등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인연복이라 한 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불가의 다른 경전은

구명보살이 정법을 구현하는 과정으로

설명해 놓기도 한 겁니다.

 

이 복은 인자를 만나는 연과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인자’는

이 지구상 인구의 단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재화나 보화 권세의 복 보다 큰 복은

사구게를 얻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님이 위에 말하는

부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중생들 중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사구게를 얻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인 중생들이

아무리 깨닫고 공부를 많이 하여 알음이 많다 해도

그것을 ‘지혜’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식’의 작용으로

선지식이란 과정도 식에 머무는 정도일 뿐

‘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말한 ‘혜’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사구게는 부처님이 설했던 무법설을 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를 달마도

오향 중 가장 수승(높은 것)한 것이

지견 해탈향 이라 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잘 모르고 나름의 개념을 가지나

이것은 그저 각자가 자기 나름으로 이해하는

편견과 아집일 뿐

그러한 이들은 고집멸도의

기본적 뜻도 모른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견해탈향이라 말한 지혜는

성불을 하는 이가 가야하는 기본적 과정으로

이거를 삼막삼보리라 이름 한 거입니다.

 

이때에 이르러 연자는 누구나

지견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들 수행의 결과로 득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과거의 부처님이나 조사는

말로서 방편을 했으나

말 이외에 존재하는 이것을

법맥 또는 도맥

그리고 불가에서는 교외별전이라 전한 겁니다.

 

이거를 다른 말로 법장이라하며

불가에서 법장을 수호하는 신으로 방편 되어

그 길을 암시한 것이 바로 사천왕으로

다만 사천왕은

법을 수호하는 신이란 방편으로 전해진 겁니다.

 

지식이나 지성은 부처님이 말한 지혜와는

그 격이 전혀 다르며

지견해탈을 득한 자를 가르켜

해인을 득했다 하는 겁니다.

 

지혜를 중요히 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며

이러한 지혜를 갖춘 자만이 지견해탈을 할 수 있기에

세상에 감추어진 비밀의 문을 볼 수 있는 겁니다.

 

팔정도. 즉 팔계는

모든 중생들이 가는 길의 과정에서

지견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지켜야하는 계율.

즉 율법입니다.

 

지견해탈을 하게 됨으로 생의 해탈을 하게 되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라는 말뜻을

알 수가 있답니다.

 

여기서 중생이 깨달음으로 이르렀다 하거나

스스로 깨우쳐서 부처라 망발을 하게 되면은

이것은 가히 최고락 당당을 말함이니

이것을 모지사 바하라 한겁니다.

 

해인을 득하여 지견해탈에 이르면

이것은 가는 길을 알게 되는 첫 관문으로

비로소 부증불감 불구부정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복되는 과정들의 의미가 왜 그리 중요한 것인가?

또는 이거이 무노진 무노사

의식계 내지 무의식계라는

역무 무노진 무노사라는 말 뜻을 알게 됩니다.

 

이미 불멸후 시대에 이르러

그 누가 무어라 해도

각자의 견해와 오만 그리고 편견에서

스스로 견해를 내는 것이지

그 말에 단 하나의 진리도 없음을

이미 과거세 부처님께서 이미 설하신 바 입니다.

 

번뇌라는 것은 해탈했다 말해도

말 없는 에고가 더 큰 번뇌라는 것.

 

그것은 이미 이 시대 아무리 깨우쳤다

또는 수행을 한 자라도

마지막 떠나는 여정의 길목에서

차마 말하지 못하는 에고만이 남을 뿐입니다.

 

이미 진짜 해탈을 한 자라면

또는 이미 지견을 해탈했다면

무엇이 해인이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스스로 죽음도 연장을 할 겁니다.

 

아니면 응당 돌아서 다시 오겠지요.

 

다만 이러지 못하는 중생은

그저 삶이 아쉬울 것이며

모르면 모르는 데로 전에도 나 없으니

당연히 이후에도 없는 것입니다.

 

오는 시대 즉 세월의 흐름을

그것은 부처도 막을 수 없으며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라 하는 그분도

막지를 않습니다.

 

특히나 부처님의 가르킴을 믿고 따르거나

공부를 하고자하는 이들이라면

불가분 선악이 없다는 것은

선악이 없어 선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여건 즉 이것을 ‘인과’라 합니다.

 

불교는 삼보귀의의 신앙이지

깨달음은 굳이 말하자면 깨어있는 상태,

즉 각성의 상태를 말하며

그래서 풍경소리는 항시 경계를 말하며

목탁을 두들기는 것은 깨어 있기를 원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크면

당연히 깨어있다는 의미마저도 모르겠지요.

 

그래서 옛 부터 절에서 법고를 치는 풍속은

하늘과 땅의 중생들에게 경계를 하여

항상 깨어있기를 바라는 보시이며 자비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채찍질하고 절제해서

스스로 인격을 함양하는 것

다만 이러한 자들이

복된 경계에 이르러 있다는 것은

이들은 당연한 연과를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