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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러면 어떻게 되나요 / 2011-07-09 04:11

category 2011년/7월 2024. 2. 8. 11:31

근대 이러면 어떻게 되나요

2011-07-09 04:11

 

 

태시 과정부터

결국 인간은 어케 만들어진 존재인가?

 

세상의 보이는 존재는 어케 존재 하는가?

 

우리 몸에 나라는 존재의식이 있고

나의 개체적 존재를 이루는 세포는 아메바이고

내 몸 안에도 수많은 세상이 존재하는 것.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세상이 있고...

이렇듯 내 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

 

이와 같이 세상을 비유하여 볼 때

세상의 중생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파생되듯 분열되는 논리가 어케 가능할까?

 

간난 아기에게

할아버지 뇌 신경세포 한 가닥을 연결하고

할아버지는 죽었다면

할아버지는 불멸 아니냐구요?

 

여기서 할아버지가

불멸이라는 조건을 성립시키려면

간난 아기가 할아버지의

기억과 행동 모든 것이 일치해야 합니다.

 

단지 뇌신경 세포 한 가닥 연결되어 있다고

간난 아기가 할아버지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유체이탈의 경우...

 

‘가’라는 존재가 있는데

‘가’의 영혼을 빼고

‘나’의 영혼을 집어 넣는다 가정 했을 때

이것이 영생 아니냐구요?

 

여기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답을 도출 할 수 있겠지요.

 

인간 존재를 알기 전에

‘가’라는 존재의 영혼을 빼 버리고

‘나’라는 존재의 영혼이 주입되었다면

‘가’라는 존재가 ‘가’에서 빠져나갔던지

‘가’안에 내재되어있던지

일단 ‘나’라는 존재의 영혼이

‘가’에게 주입되었다면

이것은 영생이 아니라 ‘빙의’겠지요.

 

즉 공생이 육생을 숙주로 삼아

기생 하는 것입니다.

 

‘업’에 관해 위에 말했는데

업이란 것 역시...

인간이 무엇 인지를 주제 파악을 해야

위의 유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답을 도출 할 수 있듯이

업이 무엇인지 알아야 겠지요.

 

전생의 업이라 한다면

이 생에 자기란 존재 이전에

또 다른 개체적 존재를 인지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전생의

또 다른 개체적 존재를

인지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잠깐씩 환영을 보거나

자기 내면의

무의식계가 작용하는 환일뿐입니다.

 

‘업’이란? 내면에 잠재된 ‘습’입니다.

 

흔히들 잘살고 못 사는 것

모자라고 영리한 것

자기만족과 불만족의 세상 기준에

업을 대비시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 전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역시 업이라 하지요.

 

다만 수행을 하든 도를 깨쳤다하든

업이 없으면 맑은 것이구

맑다면 명행족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유를 한다면 세

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이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기억을 하고 있다고 봅시다.

이것은 머리가 영리하고

두뇌 지능이 높다고 기억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의 존재

즉 죄를 짓고 삽니다.

 

이러한 허물이 업식 입니다.

 

거짓됨을 자기도모르고 하다보면

습관적으로 거짓을 하게 되고

거짓하는 것을 알아도

그 변명의 방편에서

한 번 한 거짓이

두 번으로 변명하여 허물이 되고

두 번의 거짓을 가리는 방편으로

네 번의 거짓을 해야 합니다.

결국 자기가 한 말과 행동도

망각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는 자라면

자기 삶의 길이나 지나온 과정이 명확하겠지요.

 

혹여 허물이 있어도 그 허물 기억하고

선을 베풀었다면 잊었던지 기억하던지

나름은 그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우리는 ‘명확’이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과정

하나만 가지고도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전생이라는 기억을

몇 천년이든 몇 만년이라도

생으로 말해도 백번을 태어나 백 생을 살아도

만 번을 태어나 만생을 살아도

그 생을 기억한다는 것이...

행복보다는 불행 일 수도 있겠네요.

 

질문 중에 부처님은...

얼마나 많은 악행을 했기에

평생을 선행으로 살아야 했을까? 하는

의구점 역시 맞는 의구입니다.

 

단순과 복잡한 상념의 차이 이지만 말입니다.

 

영혼이 물처럼 섞이고...

한 개의 영혼이 만개로, 만개의 영혼이 한 개로

이 중에 파생된 영혼이 자기란 존재라면

그 영혼이 만년을 살았던 천년을 살았던

당연히 영혼이 주체든 육식이 주체이던

느끼고 인지하는 그 존재는

그만큼 오래 살았어 해야 겠지요.

 

여기서 오래 살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까요?

 

오래 살았다면 위에서 말했듯이

할아버지가 간난 아기에게

뇌 신경세포를 이식했던 것 같이

그러한 조건에서는 오래 살았다 할 수 없지요.

 

즉 만개로 나뉘어 지든 억 개로 나뉘어 지든

道(길) 즉 자기가 지나온 길을 알아야

오래 살았다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책이나 전해들은 것을

마치 자기가 아는 것 같이 말 할 수는 있어도

결국 이것은 스스로 짓는 업 허물입니다.

 

질문자 말대로...

히틀러 영혼 1/3 개,

나무 영혼 1/3개,

엄마 영혼 1/3개 ^^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을 갖춘 이는

히틀러 일까요? 나무 일까요? 엄마 일까요?

 

그래서 ‘나’란 존재가 없다고 한 것 입니다.

 

영혼이 물처럼 섞이고...

말이 안되지요. ^^

그러나 가장 근사치 답입니다.

 

이 답을 부정하려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합니다.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증거가 있어야 겠지요.

 

성서를 믿는 신앙인들은 이런 말을 잘 합니다.

 

받은 증거가 많다고...

증거란 자기 혼자 상념에서

환영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증거라 하지 않습니다.

 

증거라는 것은

누구나 보고 확연하여

인정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증거입니다.

 

즉 실증이며 실상이라는 말입니다.

 

흔히들 교주(가르킴의 주인)

또는 부처라 합니다.

 

^^무슨 교주가 저 죽는 것 하나 마음대로 못하고

제 몸에 병 하나 없애지 못 하고 하겠습니까?

 

부처라...

부처라면 당연히 다른 부처도 알겠지요.

 

부처만이 부처의 말을 알아듣고

여래만이 여래의 말을 알아들을 테니까요.

 

서가모니가 옛날 옛적에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어느 곳에 있는 정도는 알아야

부처니 부처를 알아보겠지요.

 

세상사 화엄이라 해도

오는바 없고 가는바 없다.

백날을 헛소리 주절대도

천상에 있든 지옥에 있든 아니면

우주법계 흩어진 법신이라 해도

부처가 부처 어디 있는 줄을 모른다 하면

이 역시 헷소리고 공염불이겠지요.

 

인간을 ‘중생’이라 합니다.

낮춘 말이 아니라

그저 중생 이기에 중생이라 합니다.

 

또한 세상사 유정(생각하고 느끼는 것들)

무정(생각이 없고 느끼지 못하는 것 따위들)이

또한 중생이라 합니다.

 

중생이란? 깨달았다 함은 곧 중생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항상 하는 것이며

일상에서 한 순간 언뜻

느끼거나 알거나 하는 것들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처의 길이 아니며

신앙적 영생의 조건들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은 그저 중생으로

흔히들 하는 말대로 567이던 아승기겁이던

나고 죽고 나고 죽으나

어느 곳에서 오고 어느 곳으로 가는 줄 모릅니다.

 

이것을 생사윤회라 한 것입니다.

 

나무가 될 수도 풀이 될 수도

짐승이 될 수도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것

그러나 이것을 알아도 자기 맘대로 못한다면

불행한 일이겠지요.

 

나무나 돌이나 풀이나 인간이나

다 같은 것. 이것이 원자입니다.

 

이러한 윤회를 겪지 말라 한 것이

부처님 가르킴의 요지입니다.

 

중생이 나고 죽는 가운데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만약에 모든 중생이 부처라면

번뇌도 고해도 없을 겁니다.

 

응당 그래야 하지 않나요?

 

부처란 모든 번뇌를 잊었으니

또한 ‘고’가 없으니 ‘애’도 없는 것입니다.

 

인도의 서가모니 부처님 이야기를 하자면

누구나 불교인들이라면 알듯이

또는 불교인이 아니라도

책을 보고 들은 풍월로

알아도 다 아는 이야기 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부처가 죽었습니까?

 

만약에 죽었다면

제자 가섭에게 관 밖으로 발을 차내어

열반묘심의 도리를 내비치지 않았을 겁니다.

 

^^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하였고

부처는 관속에 들어 일주일이 지나서

관 밖으로 발을 차냈습니다.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불로 꼬실랐으니 죽었겠네요.

 

여기서 수행하는 수행자들

또는 깨달았다 망상하는 치들이

개 폼잡고 세상사 오가는 것이 없으니

‘무’라 합니다.

 

그러면 지가 ‘무’라 한다고 ‘무’가 되고

배추라 한다고 배추가 되고 하겠습니까?

 

지가 죽고 싶다고 죽고

나고 싶다고 나고

세상사...

지가 하고 싶다고,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삽니까?

 

오가는 것 없으니...

귀쌰데기 붙여대면 안 아픕니까?

도를 깨우쳐서 귀쌰데기 붙여대도

안 아프면 죽어도 죽은바 없고

살아도 산 바가 없겠네요.

 

돌멩이가 망치로 내려친들 아픔을 느낄까요?

그래서 석가모니라 했나?

돌 가?^^

 

이러한 것들이 잘못 전해지고 잘못 가르켜서

결국 자업자득이라 한 것 입니다.

 

인간은 행복하려면 자기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자기만족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중생을 제도하는 서원도

그러한 자들이 행복하니까 하는 경우가 있고

빌어 쳐 먹기 위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한 방편으로

구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자기만족과

서로 더불어 삶에 섞이는데 있습니다.

 

물이 섞이듯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 육신입고 오는 것

귀하고 귀한 일이라 했습니다.

 

귀한육신 함부로 하는 것 아니며

자기 몸은 자기가 보존하고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이 생에 입고 있는 옷과 같으니

비록 못생기고 모자라도

장삼자락 누더기를 기워서 꿰메 입어도

깨끗하게 세탁해서

항상 정갈하게 하듯이...

육신도 그러한 것입니다.

 

마음이 정갈하고 깨끗하면

자기육신 정갈하고 깨끗이 합니다.

 

세상에 음양도 없거니와 선악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지 못 하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굳이 이를 이름 하여 음·양이며

베푸는 것을 선이라 하고

단순하여 자기 생에 충실함을

선이라 할 수 있답니다.

 

‘악’이란 ‘마’를 악이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악해도 부처만 못하며

인간이 아무리 선해도 부처만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의 도를 중도라 하며

모든 성인의 도가 중에 있습니다.

 

도가 높다 함은 마가 극성에 이르러 있으니

일천성에 하늘은 뇌성을 발하고

땅은 지진이 일어납니다.

 

누구나 부처이고 싶고

누구나 일불승이고 싶겠지만

이 역시 삶의 경륜에서도

오래 묵은 이무기는

아무 곳에나 거쳐하지 않듯이

개소리하면서

허튼 허물을 짓는 것을 삼가해야합니다.

 

서원을 세워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나

능력을 바라는 것

중생은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싶은 욕망일 겁니다.

 

영원한 생명. 그것을 깨달은 자는

죽음 속에서도 안락하여 의지하는 것이며

의지하기에 세상을 살고

편히 가는 것 입니다.

 

모든 인간이 어린 아해로 올 때는

그리스도이며 여래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짜 여래가 아니라

여래성을 타고 왔기 때문이며

여래성이란? 여래의 성품을 말합니다.

 

마치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라고 하듯이

하늘의 신성이 ‘여래성’입니다.

 

여래의 성품으로 와서

업을 짓지 않고 살아가면

바른 지혜가 서게 되니

이를 ‘정변지’라 합니다.

 

서원은 인간이 살면서 바라는 욕망과도 같으며

바른 지혜를 구족한자라면

그 중심이 확고하니 환에 흔들리지 않고

‘귀각’에 마음이란 놈이 귀기우리지 않으니

이는 선악을 분별치 않습니다.

 

환에 흔들리지 않으니 생사가 범치 못하며

이미 바른 지혜를 구족했으니

능히 선악을 분별합니다.

 

이때 비로소 견성하니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기 온 길을 찾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 살아 온 길이 이생이나 전생이나

밝음에 있음이 명행족이라 합니다.

 

명행족의 걸음걸음 살아왔거든

비로소 선서하니

이것이 인간이 말하는 서원과 선서하는

부처의 길이 다른 것 입니다.

 

서원은 구하는 것이며 바라는 것이며

시속에 말로 욕망과 다를 바 없는 거 입니다.

 

선서는 가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며

그자 리에 서, 멈추는 것입니다.

 

멈추는 그 자리가 부처의 자리.

과거의 부처도 그 길을 가고

미래의 부처도 그 길을 갑니다.

 

이를 일러 세간해라 하며

세상을 비추는 해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있던지 말던지 존재하든지 말던지

나타나든지 말던지...

항상하여 존재하니...

산은 산 이고 물은 물이라 한 것입니다.

 

중생은 그 길이 있기에

그 길을 믿고 가는 것이며

가고 가다 보면 행하고 행하다 보면

멈추는 것을

옛 선문(도가)에서

去去去 行行行 止止止 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의 차이며

이는 선서와 서원이라는 뜻의 차이 입니다.

 

이 역시 부처와 중생의 차이며

부처도 중생이란 이 말 입니다.

 

인간이란 개체적 존재에서 인간은 생각하나

아메바 단세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나는 각이며

인간은 유정이기에 생각합니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 한 것이며

생각이 없으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모든 중생이 생의 본능으로 살아 있는 것이며

아메바 역시 생각은 없으나

자기 경계의 생각에서 생존 본능을 가집니다.

 

세상에 동업 중생들 중 인간도 이러합니다.

 

인간의 경계에서 생각하며

그 한계성이 유한합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 듯하나

이것은 귀각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생각을 끊으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은...

자기란 존재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니

그 존재가 본래 없으나

이것을 알지 못하니

아무리 득도를 말하고 깨우침을 말해도

이를 중생이라 합니다.

 

덕분에 과거 원년에 서가모니란 부처도

49년을 설하고 에라이 파토다 ^^

섯다 판에 사구는 파토입니다.

 

조ㅅ도 아무리 가르켜도 무식한 넘들이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들으니

나중에 다시 보자 한강수야 ^^

 

유마가 에라이~ 멍청한 놈들! ^^

 

어라????

유마는 우찌 우리 부처님하고

똑 같은 말을 한데?? 하면서도

부처가 따로 있고 유마가 따로 있으니

 

이러면 죽었다 깨어나도

삼천갑자 동방삯이(삼척동자)도 아는 것을

지들만 모르는 것이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계속 리바이벌..

모지 사바하 하는 것입니다.

 

무상심심 미묘이니 개경게라 함은

개방파라도 홍칠공 싸리 타수 입니다.

개새끼 잡는 데는 몽둥이가 최고라예~ ^^

 

도라는 것은...

기도 유지도 아니고 서원도 아니고

소주천이나 대주천 호흡법도 아니고

당연히 선정삼매 따위는 더더욱 아니고

모르고 삼매에 들어가면 매 허천 나게 맞고

기도도 원해여래 진실의 이고 ^^

묘법연화는 실상묘법이고

그러니 고뇌 하는 것 보다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 삶이 소중한 것이랍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 올려다보고 있으면

목아지만 아프듯이

신경계를 알려면 신경통부터 해야 되고 ^^

 

고저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고저 한 번 보는 것이 백번 묻고 듣고

풍월을 읊어 대는 것 보다 나을 테니

고뇌나 고민 따위는 치워버리고

머리에 쥐 날 테니

세상보이는 것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살아도 알지도 못하면서

허풍떨고 사는 삶 보다는

훨 나은 인생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