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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승과 삼승은 무엇이며 ?, 어떤 차별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09.02.16

2009-02-16 19:41

eowjdtks1

 

글을 잘 보았습니다.

물론 질문을 하신 분께서도,

나름의 생각과 알음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몇 자 씁니다.

 

성문이나 연각,

또는 보살승의 나타내는 바를 말 하신 것인데,

성문이 부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나,

연각이 십이지 연기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나,

또한 보살이 육바라밀을 통하여,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이나,

모두가 가는 길의 방편적 여정인 것 아닐까요?

 

육바라밀을 행하여 가는 자가,

부처의 음성을 못 들을 리 없으며,

부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육바라밀을 행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며,

이러한 자가 또한 십이인연에,

들어 있지 않을 리 없을 것 아닙니까?

 

단지 삼승과 일승은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보살승과 일승은,

동일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의 길을 가르킨 것이 부처님의 길이며,

또한 그가 가르킨 길 이외에는,

적어도 그 길에 도달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함경이든 육바라밀를 말하는 반야심경이든,

결국은 법화에 이르는 구결이니,

세상사 윤회란 것이 있어 돌고 도는 자연의 도라면,

어느 시절 성문이 연각이 아니며,

어느 시절 보살이 성문이 아닐까요?

 

불이성 불이법 이라 했으니,

두 소리를 내지 않으며,

두 법이 있을 수 없다는 말 아닌가요?

 

아시겠지만...

얼핏 법화경의 한 구절을 본 것이 있는데,

삼승과 일승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게 있더군요.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은,

범부가 아닌 부처라 이름한 것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처라 해도, 부처가 될 수 없음은,

부처라면, 부처의 지혜나 깨달음 그대로 일터이니,

그렇게 될 때 부처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성품은 지니고 있으니,

어느 시절이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그들을 부처라 이름한다고 해서,

그릇 되지 않겠지요.

 

법화에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오시는 연유가,

일대사 인의 연에 의한다고 전해진 것 같더군요.

 

그리고 세상에는 이승도 없는데,

삼승이 있겠는가? 하는 구전 역시,

방편으로 설한 것이라 합니다.

 

또한 여래는 방편으로 설한 것에,

허물이 없다는 것은,

중생이 전하신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여래가 거짓을 말하거나,

혼돈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아 은근히 네게만 말하노니,

오직 일불승을 위해서 이 법을 설하노라.

 

불존의 법은 하나의 오르는 자를 위해,

설 한다는 말 아닌가요?

머 배를 탄다고 해도, 같은 말일 테고요.^^

 

결국 삼승의 길 역시,

일불승을 위하여 방편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과거 불가 이전에도 있었으니,

현문의 일도가 그것입니다.

 

일불승이란 말은, 성불을 의미합니다.

 

많은 구전과 경전이 전해지면서,

한자나 음역의 뜻을,

달리하는 말들로 전하여지기도 하고,

때로는 각자의 개념에 따라 전해지기도 했으나,

 

반야 600권이,

그 글의 음역과 뜻을 달리하나,

보는 이에 따라 뜻은 하나로 전해지니,

이것이 ‘여래설’입니다.

 

일불승이 성불을 의미한다는 말은,

사리불의 원역을 알면 그 안에 있습니다.

 

경전을 연구하여, 구도를 하는 많은 이들이,

왜? 사리불이라 했을까? 하는 것과,

또한 사리자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에 불자가 부처 佛이 아닌,

아닐 弗이기 때문이지요.

 

佛존이 왜? 오르며,

배를 타며 성불을 합니까?

 

여기에 일불승을,

왜? 일불승이라 했는가?

하는 답이 있을 겁니다.

 

중생이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성불 할 수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며, 구도의 길을 가겠는가?

 

그저 이렇게나마...

알아들을 수 없을지 모르는,

글을 몇 자 적어 보는 것은...

 

때로는 육두 문자를 써도,

마음을 하심 하는 자는,

하심 하는 데로, 지 공덕일 것이고,

또는 알지 못하여 모르는 자는,

그 또한 지 복이 아니겠는가?

 

육천 년의 세월 속에서...

2500년이라고 그렇게 아는 자는,

그렇게 아는 것이며,

삼천년 이라면, 그 또한 그런 것이지...

 

이것이 내 앞의 상대를 부처라 보면,

부처라 하는 말과 머가 다를까?

 

중생이 무지하여 복 없음을 한 한것도,

천년을 살아도 모르고, 만년을 산다 해서 알겠는가?

 

성불을 이룬 이가 그대로 나타난들,

그것을 기묘하다 하지 않겠는가?

 

증상을 보면 믿고,

그리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보살의 길이란? 대승을 말하는 것 아니며,

제 몸도 구제하지 못하는데,

무슨 일체중생 성불을 논하겠는가?

 

어느 자가 있어 홀로 독의 길을 가든,

그가 천태의 성자 나반이든, 성불을 한다면,

중생이 어찌 가엷지 않을까?

 

그것을 가는 길에 있어서도,

인간의 망심으로 한 생각을 일으켜,

소승이니 대승이니 구분 지으니,

스스로 마구니들이 아닌가? 살펴볼 일 아닐까?

 

대저 도를 구하는 자는,

스스로 행으로 덕을 입고, 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월이 수천 년이 흘러도,

인연의 복이 없거나,

한 생각 망심 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길이란?

길이 있음을 알면, 진성은 묵묵히 가는 것이다.

 

때가 이르러 인연이 다하면,

필시 만나지는 것 아닐까?

 

ㅋㅋ 거냥 몇 자 찌끌어 봤슴다.^^

 

====== 댓글 첨부 ======

eowjdtks1님

09.02.16

 

보는눈님 글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온이 개공하여 무아가 되면,

일불승이 된다 하였는데,

또는 부처의 세계가 적멸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학과 현실은,

같은 이치라 하셨는데 ^^

 

교학이 현실에 묻힌 겁니까?

아니면 현실이 교학을 삼킨 것입니까?

괴리가 있는 논리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답 없는 길을 가르키셨 겠습니까?

 

ㅋ 아래에 쓴다는 것이 내용이 같아 여기에....

하나의 길에는 두 소리가 있을 수 없다 했으니,

현실의 이치에 맞는 것이다면,

 

교학 이라는 것이,

잘못 가르켜 지고 있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논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