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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종말과 예언과 실체 / 견성이란?

2007.11.20. 01:26

 

 

태 산(xkqakdnsxls)

 

견성이란?

 

말 그대로 자기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자아라고 하기도하고 본 성품이라 하기도 하나

결국은 그 말이 그 말.

 

이것은 불가에서 옛부터 말하던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본을 말한다.

 

때로는 화두라고 거창하게 말하는 이 머꼬?

부모미생전 이란 것이며.

 

이것을 알기 위해 돈오도 하고 점수도 하는 것이다.

 

견성이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체적 규명이다.

 

견성성불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결국

견성을 해야 성불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은

 

견성을 한다고

다 성불할 수 있다 한 말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 자아의 존재를 깊이 ‘관’하게 되면

때로는 돈오를 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로써

혼돈에 빠질 수도 있으며

환상 따위에 몰입할 수 있다.

 

또한 일관적으로

자기 존재 하나만을 보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혼돈이 오고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神이 발동하게 되면

무당과 같이 점을 치거나

약간의 앞일을 알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함은

결국은 그것은 그것대로 숙업인 것이다.

 

그러나 살아온 과거 숙업이

도가에 정진하였거나 불가에 정진했던 식솔들은

빠른 진전을 보게 된다.

 

그러고 곧바로 점수에 들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여기서 점수에 들어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고로

이 세상 인구 중에 실체가 몇 안 된다면 믿겠는가?

 

그래서 돈오와 점수는 하나라 한 것이다.

 

점수를 해서 돈오 하는 것은

거짓된 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하는 것이다.

 

점수란 것은?

집어서 하나씩 과거의 과정과 숙업을 깨우쳐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글공부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며

배워가는 것이 아니다.

 

돈오를 한사람이 자기의 숙업 과정만큼 확인하여

과거의 숙업을 알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길이다.

(과거 인연에 의해서 닦아진 깊이나 길이 만큼

그 사람의 숙업을 깨우치는 것도

각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고 처음 시작된 숙업의 과정까지 들어가서

과거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깨우치고

바로 알아 현재의 과정까지 짚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을 견성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짚어나오는 과정에서도 큰 잘못이 있다면

그 경중에 따라 스스로 성불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의 위신력으로

귀의를 하여 한 몸 다시 맡기고 끝을 알 수 없는

다음 생을 기약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관세음과 지장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불 역시 하나이다.

이 진리를 알면

경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왜 인간도 닦아서 갈 수 있다고 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런 과정에 들기도 어렵거니와

견성을 하여 일념 불 속에서 불타가 되기를 갈망하여

죽어 갈 때까지 한 자락 일념을 놓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불타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부처님이 아니다.

 

이것은 각자이며 깨우쳐 어느 날엔가?

삼니와 같이 성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참고로 한마디 이해를 돕는다면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도 잘못된 말이다.

부처님이란?

인간이 알고 있는 신앙적 존재의 대상이 아닌

각자로써 깨우쳐 아는 자를 말하는데

부처님의 어원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에서는 천자의 어머니를 부처님이라 한 것이며

황제의 부인을 부처님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어휘가 그대로 전해져서 부처님이라 한 것이며

정확히 말하면 신앙적 대상은 佛 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이 깨우쳐 가는 길은

경전에도 명시 하였지만

불타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반야라 하며

이렇듯 반야를 실제 알게 될 때

비로소 열반 묘심을 알게 되어 있다.

 

이것은 견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일단은 견성을 해야 다음 단계를 알 수 있게

안배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견성을 해도 법화경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반야를 체득할 수 없다.

 

이것이 하늘로 가는 진실된 길이다.

 

그러나 견성을 하게 되면 실제 자신이

반야를 체득할 인연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된다.

 

비록 불가의 경전이 문구라도 온전히 보전되어 있어

불가의 비유를 들어 방편을 삼으나

모든 종교의 원천은 여기에 있다.

 

도가의 전해진 경전이 있으나

이것은 난해하여 이해하기가

불가의 법화경만큼 어렵다 할 것이다.

 

불가의 경전이

난해하여 법문을 오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으나

실체의 뜻을 알게 되면 보편적인 상식과 통한다.

 

도가의 경전은 단맥으로

반야를 깨우치고 운용하는 기법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금강경을 깨우쳐 알아야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경전이다.

 

금강경의 요지는

반야에서 깨우친 것을 모두 잊어야 되는 단계로

인간은 갈 수 없는 단계이며

이것은 진공묘유와 통하며 ‘정’ ‘혜’라 한다.

 

반야까지를 知(지)라고 보면 된다.

 

인간으로서는 반야의 단계에 들게 되면

그 이상 위가 없는 지혜를 갖추어

지견혜탈이라 한 것이다.

 

이때 비로소 열반묘심을 알 수 있으며

이를 가리켜 불타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길은 죽은 자는 절대 갈 수 없는 길로

산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을 비유해 육다바라밀이라 밀전한 것이다.

(육신으로 닦아서 가는 길)

 

모든 도에 들어 열반을 말하는 중생들은

이 길을 거치지 않고 열반을 말한 길이 없다.

 

믿음으로 간다 하는가? 진실로 믿음에 이르러

삼천대천의 세월인 삼천년의 세월을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온 자는

필히 그 믿음의 주인을 만나 능히 구경열반 하리라.

 

과거 겁년의 석니가 인간으로 이 길을 간 자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으리라.

이것은 ‘법’이라 바뀔 수 없다.

 

이것이 불이법문 이며 불이성 이다.

 

인간이 세상을 다 얻는 것보다 큰 복이 무어라 했는가?

 

만약 사구계를 얻어 지닐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을 수 없다 한 것이다.

 

사구계란?

중생들이 말하는 그따위 고리타분한 계율이 아니라

석니가 원년에 설한 설법을 말하는 것으로

사십구년을 설한 福音(법문)이다.

(즉 석니의 도를 말함이다.)

 

이것이 반야이며 반야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필히 통해야 하는 관문이다.

 

이것은 법화경에 말한

복 중의 제일 복이 인연복이라 한 밀전이다.

 

이 길을 알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연’법으로는 십사만사천이요.

‘인’법으로는 십이 인법이 있다.

 

십사 연법은 중생의 연법이요.

(이것이 십사만 사천이니 아미타경문이다.)

 

십이 연법은 혈통의 법이니

이들은 일대의 혈족들이다.

(이것은 달마가 말한 혈맥관통이다.)

 

견성이란?

저도 모르면서 남을 아는척하거나

깨우친 척하는 것이 아니다.

 

견성이란? 알아 깨우친다 해도

잘못하면 바보가 되는 길이니

이것 역시 인과요 숙업이라.

 

열반이란?

반야를 알아 넘어서는 자가 가는 길이지

그 외는 죽음이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완전수 7이라는 숫자의 의미다.

 

인간이 6으로 태어나서 6을 버리는 것은

7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것은 죽음이다.

 

죽어서는 8도를 넘어 설 수 없으므로

사해 (죽음의 바다)라 한 것이다.

 

이것은 천부경 81자의 수리 식에 밀전 한 것이다.

 

오직 살아서 깨우쳐 아는 자 만이

6에서 9궁에 들어가는 진리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아해 들이 놀이 삼아 하는 369 게임이다.

 

3에서 6으로 6에서 9로 가는 진리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휴거?? 웃긴다. 애기들 앞에서는 뭔 말을 못해.

지 맘대로 말하고 지 생각대로 애기 하거나 전하거든.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알 수 없지. 그러니 답이 없지)

 

세상의 심판과 종말을 말하는 것들은

저희도 알지 못하는

성경 나부랭이 몇 구절에 얽매여 말하고

종교적 아집에 빠져서 예언서나 들먹 거리나

실상의 뜻을 아는 넘은 없으니 어이 된 연고인가?

 

그러나 결과는 맞는 애기다만

그들이 선택되었다는 구절은

어느 경전 한 구절에도 없으니

이것은 인과를 알고

윤회의 숙업을 알면 다 알 수 있는 것을??

 

허깨비 같은 것들이 세상의 재난만 일어나도

그것을 예언서 따위에 결부시키지를 않나?

 

세상의 재난이란 것이 자업자득.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당하는 고통 아닌가?

 

간단히 말하면 견성이란?

자기 본체 숙업의 과정을 알게 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진실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을 경험하여 알 수 있는 사람은 필시

돈호의 과정을 거친 다음 점수를 마저 끝낸 자이며

이것을 마치고 나면 스스로

성불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석니는 견성을 하는데 설산에서 6년의 고행을 하고

달마는 9년의 면벽을 하였으니

어찌 쉬운 일이라 하는가?

 

몇 년 교도소에 가서 별 달고 대장 노릇 하듯

산사에서 밥 먹고 똥 싸며

몇 년 주워 들은 식으로 견성을 말하고 열반을 말하면

지나가는 개새끼는

행여나 복이라도 빌어 볼까? 하고 꼬리라도 흔들지만

허 글쎄!!

대구리 정신 제대로 박혀서 대구가 상통한 넘들은

웃어버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