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삶의 무게는 얼마나될까요? / 2010-12-24 05:55

category 2010년/12월 2024. 2. 8. 11:08

삶의 무게는 얼마나될까요?

2010-12-24 05:55

 

 

삼라만상은 천태만상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태어나는 모든 것,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태’에서 나왔다는 말이며,

 

‘삼라’

즉 보이는 모든 것은,

역시 하늘로 부터라는 말입니다.

 

삶의 무게는...

굳이 부처님의 가르킴이 아니라도 행업의 소산이니,

각자가 짊어진 무게만큼 다른 것입니다.

 

부처라 해서 삶의 무게가 없었다면,

굳이 맨발로 걸식하며,

사구(49)년 행업을 하지 않았겠지요.

 

이와 같이 한 행업의 결과가 ‘무법설’이라 해도,

그것을 가르킨 여운은 남는 것이니,

이것을 생의 그림자라 합니다.

 

이렇듯 인생은 작든 크던,

그림자를 남기고 살아갑니다.

 

다만 이것을 행하는 자체만 모를 뿐 이지요. ^^

 

누구나 ‘아’를 가르켰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어’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어’가 어 되어 계속...

어! 어 어 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을 ‘업장’이라 합니다.

 

어 어 어 를 계속 한 만큼의 삶의 무게도,

그 만큼 이겠지요.

왜냐하면 기실 말은 하면서도,

결국 말하는 그들도 답이 없기 때문이지요.

 

답이 없는 것은,

결국 답이 없는 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만큼 삶의 무게는 큰 겁니다.

 

욕망의 산물이라 원죄를 말했고,

이것은 다만 그들이 허물을 원죄라 하여,

굳이 어 어 어 할 뿐이지요.

 

이것은 마치 에덴이란 설정에서,

무엇이 선악과 이며,

결국 그로 인한 원죄의 소산이 인류의 죄업이며,

그러나 너희는 즐겁게 만물을 다스리라 하는 것과는,

상호 모순되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도...

카이샤파야...

‘마음의 상을 구하라’

‘그러나 머무는바 없는 마음을 구하거라’

했듯이

 

이것은 다만 카이샤파에게 한 말을,

굳이 다들 중생이,

자기를 가르키는 말인 줄 알 때는 답이 없지요.

 

왜냐하면 중생은...

그들 나름의 개체 별 중생이지,

카이샤파가 아니거든요.

 

이 마음의 가르킴을,

굳이 자기에게 대비하고 싶거든,

카이샤파가 되어 보던지,

아니면 부처가 되어보아야,

마음의 진리를 알 수 있겠지요?

 

이것은 마치 어리석은 중생들이,

재벌가의 누구는 좋겠다. 하는 것은,

그들의 짊어진 짐을 모르기 때문 이지요.

 

대부분의 중생은,

그것을 체감조차도 못하는 거이지요.

 

왜냐하면 재벌가라는 선망의 대상이,

그것을 생각하는 중생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다만 성숙된 중생은,

삶의 분별은 깨우쳐 알고,

중생이 중생을 분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겠지요.

 

삶의 무게도 이와 같은 것이며,

짊어진 무게가 클수록,

자성을 찾아 깨우칠 확률이 높은 것이지요.

 

물론 그대 중생들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나옹의 선시가 말하는 뜻이,

무엇을 말하는 지는,

누구나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는 있을 것이나,

이 역시 중생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는,

전혀 다른 거이지요.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하늘을 향해,

티 없이 살았다 하는 이들, 있을 수 없든...

깨달음을 모르고, 청산이 하는 말 알지 못하거든...

‘무기’를 모르니 아는바 없는 하급중생이며,

인생은 녹음이 되고 녹화가 되는 것을 모르니,

과거 하늘의 안배인 ‘범망경다라니’를 알지 못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을 입으로는 말하고,

육식은 이것을 모르는 바 없으나,

기실 그것을 아는 이는 없고,

 

그래서 삶은 고해이고,

번뇌의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 아니라,

이 바다에 풍덩 빠져,

이미 헤부작 거리다,

죽은 귀신들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삶의 무게를 한 올 남김없이 털어내고,

진짜 바라문을 바라보거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그러나 바람에이는 잎새에도,

나는 떨어야 했다.

 

아무리 태산이 높다하나,

결국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은,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서 뫼만 높다 하더라.

 

이렇듯 태산을 오르려거든,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 지고,

다리는 쳐지고, 고지는 아득한데, 몸은 지치고,

결국 오르고 오르다 죽기는 죽지만,

정상에 오르는 그들도...

결국은 하늘아래 뫼(묘동)인 것을... ^^

 

결국의 중생의 답은...

털어내고, 털어내고, 털어내서,

자기 없는 무아의 존재를 느끼면,

삶의 무게 따위가 없겠지요. ^^

 

그러나 다시 돌아보는 것은,

그들이 무어라 해도,

‘사무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맹정진 ^^ 객기와 호기,

그리고 다듬어진 ‘기상’과는 다르겠지요.

 

삶의 무게는 이러한 거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