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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나(Purna)가 그린 석가모니 / 2006-02-23 11:20

category 2006년 2024. 2. 19. 08:42

부루나(Purna)가 그린 석가모니

2006-02-23 11:20

 

 

Crazy people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들 중

특히 부처님 가까이서 보필하며

부처님의 전법을 도우면서 수행하던 10대 제자들은

유독 자신만이 제일 잘하는

두드러진 각각의 특징들이 있는데

 

어떠한 어려운 법문도 상대방에게 잘 풀어서

이해시키는 능력이 뛰어나

부처님의 법문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 해서

설법 제일의 "부루나" 존자 입니다.

 

중국에서는

세계문화의 중심이 자신들이라는 대단한 자긍심으로

어떠한 외래어도 의역(意易)인 뜻을

번역을 하지를 않고

소리 나는 음과 가장 가까운 한자로 음역을 하였기에

전체이름인

"부루나미 다라니 자"(富縷那彌多羅尼子)로 번역했기에

음역된 한문 자는 소리 표기로서의 번역이지

한문 자의 뜻과는 아무러한 연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상을 사실대로 그린 부루나는

교살라국 사람으로서 바라문 종족의 출신이었고

부루나의 아버지는 가파라 왕국의 왕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가 되는

정반왕의 국사(國師) 이였으며

가정은 아주 부유한 부자의 집안이었으며

부처님과 생년월일이 같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인도의 정통 힌두 경전을

4 페타와 5 명(明)을 통달하였으나

세속적인 삶에 일찍이 환멸을 느끼고 입산수도를 하던 중

부처님이 성도 하여 녹야원에서 설법하심을 듣고

수도 하던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여서

아라한 과를 얻었으며,

변재가 훌륭하여 수많은 제자들 중에 설법 제일로

부처님을 도와서 중생교화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림도 소질이 있어서

어느 날 부처님의 초상을 그려 놓은 것이

전래 되고 있었는데

 

영국의 인도를 식민화하던 통치 시절

영국에서 가져가서(강탈)

현재 대영제국 미술관에 소장되어있으니

기회가 되시면 직접 가셔서

더욱 상세한 내용을 직접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질문에 없는 과 외의 추가 글입니다만

위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영과

현재의 많은 사찰에서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상호와

많이 다른 점은...

 

원래 불상이란?

부처님 열반에 드신 후로 약 500년 동안 없었던 것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북방 진출로

인도와 현재는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지역까지 세력이 미칠 때

간다라 지역을 통치하던 그리스의 총독이

우연한 기회에 부처님의 법문에 심취하게 되고

그리스인들의 조각하기 좋아하는 문화의 영향으로

그리스인들에 의해 많은 조각상이 생겨지게 될 때

최초로 불상이 만들어지는데

 

이 시절에 만들어지는

초기 불상의 미술품이 나오는 시기를

간다라 미술이라고 하여

미술사적으로도 유명한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보이는

불상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고

그러한 초기 불상이 동북아시아로 전래 될 즈음에는

대승불교의 부처님의 상호에 특징인

32길상과 80종호라는 이론적인 형상의 특징을

부처님의 모습을 조성하게 될 때

상호에 나타내게 되었고

 

또 그 지역의 사람들의 모습도 닮아 가면서

석가모니의 실제 모습에서와 달리

부처님 몸에 나타난다는 32길상과 80종호의

육체의 특징의 이론을 부처상에 부각 시키면서

오늘날에 사찰의 부처님의 상호로 존숭 받는

변천 과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상이

다른 곳에도 몇 종류가 존재하며

불란서의 루불 박물관에도

16세 정도의 싯타르타 태자 당시

소년 시절의 모습인 초상도 있지만

질문자님이 의문을 제기한 위의 초상화가

가장 고증도 정확하고 근거가 확실한

사실적인 부처님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부루나가 출가하여

부처님을 측근에서 모시면서 그린 초상화라고 하며

부루나가 부처님이 성도 한 후에 출가를 하였다고 하니

부처님이 35세에 큰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초상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느 단체에서 사용하는 것이냐고 하셨는데

어느 단체에서

저 초상을 가지고 예배 대상으로 하고 있는 곳은 없고

역사적 사실 대로의 남아 있는 기록의 초상이기에

기념으로 정도로 영인본이 인쇄되어 만들어져

여러 곳에서 나누어 가지게 된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부처님 자신부터 살아생전에 부처가 되는 자리인

깨달음의 해탈 열반의 경지인 부처님의 마음은

삼처전심이라고 하여 말과 글을 떠나서 전하시었기에

 

부처님의 형상이나 모습은

어떠한 조형물로나 그림으로조차 표현한다는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으로

초기 불교에서는 일체 어떠한 형상도 없었던 것이었는데

앞서 잠시 불상의 유래에서 말하였듯이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과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부처님의 32길상과 80종호라는 형식을

부처님의 형상에 등장시키면서

오늘날의 불상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실화 자체에는

그저 기념 정도로의 의미이지

어떠한 예배의 대상으로서 존재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사찰에 모셔진 불상은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라는

특징을 부각 시키다 보니 사실적인 면이 많이 축소되고

또 전래 되는 지역의 사람들의 상호도

약간씩 닮아가는 면도 있지만

부처님이 출가 후 상투머리에서 삭발을 하였을 텐데

어찌하여 부루나 존자가 그렸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실적인 초상에서는 장발일까?

하는 의구심도 있을 것 같아

부처님 두상의 삭발에 관하여 좀 더 부언을 해드리자면

부처님의 열반 후에 약 500년 동안까지는

일체 어떠한 상호의 조형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약간 언급하였다시피

부처님께서 생전에도 성도 후에

마음을 깨달은 부처의 경지는 49년.

 

그렇게 수많은 법문을 하시는 중에도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자리이기에

"삼처전심"이라고 하여

생전에 세 곳에서

말없이 법을 마음과 마음으로, 즉 이심전심 전하셨는데

 

첫번째가 어느 날 영산 회상에서

일만이천명의 수많은 대중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데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고요히 앉아 계시다가

연꽃 한 송이를 가만히 들어 보이시니

모든 일만이천 대중들이

 

‘도대체 부처님께서 무슨 연고로 법문은 하지를 않으시고

연꽃을 들어 보이시는 것일까...?’

모두들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 많은 대중 가운데

십대 제자의 한사람인 마하가섭(카아샤파)이

연꽃을 들고 계신 뜻을 알고 빙그레 미소로서 답을 하니

부처님께서도 가벼운 미소로서 가섭의 마음을 아시고는

곧 대중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安裝)이 있는데

이것은 말과 글을 떠나서 직지인심(直至因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것으로

이것은 말과 글을 떠나서

이심전심으로 전해 받을 수 있는

나의 정법안장을 마하가섭에게 부촉 하노라’

하시면서

 

가섭존자에게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 열반의 경지를

첫번째 정하신 영산 회상의 염화미소 입니다.

 

두번째로 어느 날 다자탑 앞에서

법문을 하기 위해 그날도

수많은 대중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려고

조용히 앉아서 있는데

그때도 가섭은 이 외부의 일을 보고서

제일 늦게 법회 장소에 도착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에게 합장으로 예를 갖추고

대중들의 자리에 가려는 가섭을

말없이 부처님의 법문하시는 자리의 반을 내주면서

가섭에게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는 것으로

 

말없이 법을 두 번째로 전하신 다자탑 전 분반 좌 요.

 

 

마지막 세번째로는

부처님께서 80세 되시는 2월 8일

사라수 나무 아래에서 춘다 라는 제자가

부처님에게 올리는 버섯 죽 공양을 드시고는

측근에 모여있던 여러 제자들 앞에서

‘오늘 이만 사파세계와의 인연을 그만 접어야겠다.’

하시고는 자리에 드러누우시자

 

제자들이

‘부처님이 그렇게 훌쩍 떠나시면

저희 들은 누구를 의지하며 지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는 슬피 울자.

 

부처님께서 세연을 마치려다가 다시 일어나 앉으시고는

 

‘아니 너희들은 이제 나의 사대(지수화풍地水火豊)가

본귀환처(本歸還處)하려고 하는데’

 

<즉 불교에서 4대란? 우리의 육체인 몸이

크게 네 가지의 성분인 흙,물,불,바람으로

임시 모여져 있다고 하는 것인데

이 지수화풍의 네 가지 성분은

온 우주의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기에

사대(四大)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지껏 나를 믿고 따랐다는 것이

이 허망한 나의 사대를 보고 따랐다는 말인가?’

하며 크게 꾸짖으시고는

 

‘누구나가 모두 가지고 있는 자성의 법을(불성) 깨닫고

우주 진리의 법을(진여의 세계 즉 법신불) 깨달아서

즉 자등명 법등명 하라’ (自燈明 法燈明)

 

= 스스로 마음의 불성을 밝혀서

우주의 진리자체인 비로자나 부처와

하나로 계합되는 부처를 이루라는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는

자리에 오른쪽으로 팔벼개를 하시고는

조용히 세상 인연을 거두시니

 

제자들이 금관에 부처님을 모시고는

다비 준비를 하려는데

부처님의 법을 생전에 이어받은

마하가섭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10흘 이나 지나서 늦게 도착하여

부처님의 금관을 시계방향인 오른쪽으로

합장하고 세 바퀴를 돈 후

엎드려 부처님 금관 앞에 오체투지 하여 예를 갖추자

 

부처님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오니

이것을 가리켜서 사라수 나무 아래에서

말없이 발을 내어 보이시며

 

세번째로 법을 전하신 사라수하 쌍시곽부 라는 것으로

심처전심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부처의 자리가

이렇게 말과 글로서도 표현이 안 되는 자리이기에

부처님의 열반 후에 부처님의 상호를 조성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것으로서

부처님의 불멸후 약 500년 동안에는 어떠한 그림조차도

부처님의 표현을 하여 놓는 것은

금기 사항으로서 일체 없었던 것이고

어느 신을 숭배하는 종교보다도

일체의 상을 배제하는 종교 이였던 것이

어떻게 하여 불상이 생겨지게 되는고 하니...

 

인간들의 흥망성쇠 흐름에 따라

부처님의 열반 후 약 500년이 지난 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세력 진출로

인도의 북방 지역까지 그리스의 세력이 미치게 되는데

이때 마침 그 지역의 총독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의 조선 총독이

모든 정치적인 것을 관장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많은 지역을 관할 통치하고 있던 그리스 총독이

우연한 기회에 부처님의 기록을 전해 듣게 되면서

불교에 상당히 깊게 심취되는 연유로 인해

그리스인들의 특오한 건축술과 더불어

많은 인물 조형술에 뛰어나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조형미술의 발달로

총독의 명령으로 터부시되어왔던 부처님의 불상이

처음으로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조형되었던 많은 불상 등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으로

조형된 지역의 이름이 간다라 지방으로서

현재의 파카스탄 정도가 됩니다.

 

미술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간다라 미술 시기가 바로 이때가 되는 것인데

이 시절의 부처님의 전반적인 불상의 모습을 보면은

실제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리안족의 모습과

동양적인 모습이 절충된 상호 이것인데

간다라 미술품에서 보이는 모든 불상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마치 그리스인들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상도 거의 성도도 하기 전의 고행상 에서라

머리를 삭발할 사이도 없었겠거니 라 하지만도

성도 후의 불상을 보더라도

상투는 풀었더라도

우리나라나 동양의 스님들처럼

면도로 완전히 삭발한 모습은 볼 수가 없는 것이고

간다라 미술 시대가 동진 하면서

마투라 지역

현재의 아프카니스탄과 티벹의 접경지역으로 오면서는

상투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곱슬머리를 가위로 대충 자른 머리로

변모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더욱 동진하여 티벹과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부처님의 머리가

동글동글 구슬 모양으로 변형이 되는 것은

그쪽 지역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곱슬머리인 것을

출가하였다 하더라도

요즘의 스님들처럼 완전 삭발이 아닌

곱슬머리를 4~5센치 정도의 긴 상태로

가위 같은 것으로 대충 자른 머리였기에

이것을 조형하기란 마치 헐크러진 상태여야 하는데

 

대승불교가 생기는 무렵에는

부처님의 특별한 외형의 모습에 32길상과 80종호라는

112군데의 특징이 이론으로 성립되기 시작하는데

그 특별난 상호 중에 하나가

부처님의 모든 털은

오른쪽으로 감아올라가게 나 있어야 한다는

특별한 이론이 등장하다 보니까

또 곱슬머리 짧게 자른 머리를 형상화하면서

정돈된 모습으로 하다가 보니

오늘날의 그러한 동글동글한

커더란 구슬이 모여있는 것 같은 머리모양으로

고형화 된 것이고

 

거기에 부처님의 두상의

정가운데 윗부분은 육계라고 하여

부처님만이 특별나게 뼈와 살이 툭 튀어 올랐다는 것도

사실은 간다라를 지나서 마투라 유적에서 까지는

곱슬머리의 상투가 남아 있는 조형물이

뒤 석기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인도나 간다라 마투라 지역의 상투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손가락 모양처럼 가는정도가 아니라

곱슬인 연유도 있고 숫도 많은 연고로

상투가 커다란 주먹 크기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모자 격인 터번을 두를 때에도

축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고요.

 

이러한 상투의 자리와

적당히 대충 자른 머리와의 절충이 혼합되어

불상이 만들어져 전래가 돼가다 보니

부처님의 머리 윗부분이

마치 물동이 똬리 올린 것 둥글게 이단으로 되어진 것이

부처님의 32길상으로 승화되어 표현이 확대된 것입니다

 

이러한 여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생존 시에는 완전 삭발이 없으며

현재의 동북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모든 불상이

삭발 머리가 아닌 곱슬머리를 대충 자른 머리를

정돈하여 구슬모양으로 조형된 것인 것을 수가 있으며

 

질문자님이 올려주신

마치 30여년 전 우리나라에도

장발이 유행했던 시절의 머리 같은 부처님의 머리가

정상적인 고증으로도 맞는 초상으로 수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며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출처: http://kin.naver.com/open100/